MWO안선생님

the hateful west 0.22

2016. 2. 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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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teful west ver. 0.2

2016. 1. 2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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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TEFUL WEST

2016. 1. 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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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ens - The Anecdote 리뷰

2015. 12. 13. 02:52 : 평/악

E-sens - The Anecdote 리뷰




 E-sens(이하 이센스)의 The Anecdote(이하 에넥도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들이 있었다. 대충 모두가 다 아는 얘기인 대마초 사건으로부터, 아메바 컬쳐와의 재계약 불발, 컨트롤 디스전, 그리고 그 이후의 대마초로 인한 재구속 - 수사 중 또 대마 흡입 - 1심 유죄 선고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센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데에 충분했다. 다시 잡혀들어가는 이센스를 보며 대중들은 '10년후에도 프라이머리의 독이 니 대표곡'*1 이라던 개코의 신랄한 디스를 떠올렸다. 이센스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고, 이센스의 첫 솔로앨범 '에넥도트'의 발매는 그렇게 소문만 무성한 채 무산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구치소 밖에는 앨범 발매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센스의 소속사인 비스츠앤네이티브스는 '앨범 자체는 작년 말(2014년 말) 발매 예정이었'으며 '법률자문을 받았으나 앨범 발매에 법적으로 문제되는 부분은 없다' 며 의견을 밝혔다. 어쨌든 만들어놓은 앨범은 발매를 해야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또 이센스에 대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센스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센스의 음악을 - 2008년의 믹스테입 열풍, 꽐라 열풍, 슈프림팀 활동, 그리고 프라이머리의 '독'까지 -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센스의 앨범을 기대하고 있었고, 미리 들어봤다는 딥플로우의 '한국의 일매틱이 될 것'이라던 트위터는 그들의 기대를 한층 더 달아오르게 하는데에 충분했다. 결국 구치소에 있는 이센스의 동의를 얻어, 에넥도트는 2015년 8월 발매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옥중앨범'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에넥도트의 핵심은 간결함에 있다. 에넥도트는 다른 모든 것을 최소화한다. 앨범 커버에는 사진이나 그림 한장 없이 K.M.H.(이센스의 본명 강민호의 이니셜이다) 세글자만 적혀있을 뿐이다. 트랙리스트를 봐도 심플하기 그지 없다. 그 흔한 보컬/훅 피처링 하나 없고, 어떤 이름 모를 래퍼(Kim Ximya)의 랩 피처링 한 절만 기용돼있다. 비트 역시 이 간결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미니멀한 비트는 음악적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방향으로 짜여져있다. 비유하자면, 하나의 울림통을 구축한다. 


 이렇게 비워진 음악적 공간 위에 이센스의 담담하고도 시니컬한 랩이 얹어진다. 이센스의 미세한 박자 운용 하나, 단어 하나가 울림통을 타고 증폭된다. 마디를 쪼개고 또 이어붙이는데에는 이센스만큼 잘하는 사람이 없다. 느슨하게 늘어지는 플로우와 비정석석이고 불규칙한 라임·리듬 배치를 통해서 이센스는 랩의 형식미를 지키지 않는 듯 지키는 선을 유지한다. 리듬은 무너지는 듯 하면서 복구되는 양상으로 긴장감을 형성한다. 형식의 미와 파격 사이에서 이센스의 랩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곡예를 이어나간다. 줄타기를 해간다. 


 느슨하게 외줄타는 랩은 에넥도트의 내러티브와 어색함 없이 어우러진다. 에넥도트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센스의 생각들과 인생사가 담겨있다. 아무 생각 없던 학생 때부터, 노가다 판 전전하던 시절, 영등포 옥탑방 이야기, 그리고 차례차례 한발씩 한국 힙합의 중심부로 진입하던 그 일화들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홀로 남은 지금의 심정까지, 이센스는 비트 위로 이야기들을 옮겨놓는다. 그 이야기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센스가 그동안 믿고 기대왔던 것들, 이센스를 움직였던 것들이다. 가치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건 돈이었고, 명예였다. 일면은 여자이기도 했고, '뭔가 재미있는 것'이기도 했으며, 가장으로서의 압박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센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아련하다. 그것이 단순히 옛날 이야기여서가 아니다. 자신이 추구해왔던 그 모든 것들이, 그토록 선명하고 확연해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흐릿하게 바래졌기 때문이다. 슈프림팀 활동을 통해 얻어본 그것들이 결코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2 까지 해가면서 얻을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회환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랩을 해나가야 하는가. 그의 '롤모델'*3 조차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 어떤 것도 믿고 나아갈 수 없는 순간에 이센스는 봉착했다. 에넥도트에 배여있는 짙은 염세와 허무의 냄새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센스를 지금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돈도, 명예도, 여자도, 한국힙합에 정점에 서겠다는 그런 야망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아닌 것들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없다. 랩 유희가 주는 순수한 재미이거나,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순간'*4이 주는 해방감 같은 것이리라. 또는 가짜는 될 수 없다는 그 강박감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건 진실해야한다는 힙합의 정언명령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다. 정작 이센스 역시 아직 잘 모르는 듯 하니깐. 몇번이나 그 감정의 공허를 대마연기로 채우려 했으니깐. 



 이센스는 '나에게 의미있는 음악'을 하겠다 말했다. 또 이센스는 '요즘 한국 힙합 듣고 좋은 적이 없었네' 라 말한다. 그렇게 이센스는 한국 힙합 트렌드와 정 반대되는 앨범을 만들었다. 그 흔한 언어유희도 없는, 돈 자랑, 여자 타령 하나 없는 앨범을 만들었다. 정공법으로, 간결한 비트에 그의 삶과 허무를 얹어 랩으로 흘려보내는 것으로, 이센스의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 순수하고 진실한 울림을 준다.


 11월 말, 이센스의 상고심이 종결되었다. 1심에서의 형량인 1년 6개월이 유지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이센스는 상고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센스의 행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센스는 그 허무의 끝에서 답을 찾아낼수 있을 것인가. 다시 나온 뒤에는 마약을 깔끔하게 끊고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인가. 사이먼 도미닉은 정말 이센스를 친동생처럼 돌봐 절대로 다시는 마약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센스에 대해서 선명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대하게 되는 그 마음. 존나 잘하는 새끼가 왜 씨발 마약을 해서 이지랄이냐는 그 마음. 그건 아마도 우리가 지금 한국힙합 사상 유래없는 재능을 가진 래퍼의 미래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에 드는 마음일 것이다. 



*1 Gaeko - I can control you

*2 Primary - 독(feat. E-sens)

*3 Gaeko - I can control you, E-sens - True Story

*4 E-sens - M.C.(feat.Ga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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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 불한당가  (0) 2014.02.12
Posted by 혼자노는 안


[버드맨] 리뷰 


정점에 서야만 하는 그 남자에 관하여


모든 남자에게는 세상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모종의 욕망이 있다. 리건 톰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이나 집착에 가까운 수준의 욕망이 있다. 그는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이 자기의 반도 안 되는 재능으로 자신보다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을 보면 분노가 끓어오른다. 비행기 사고로 죽느냐 마느냐의 순간에 '앞좌석에 앉은 조지 클루니가 나를 제치고 1면에 나올 텐데' 라는 고민을 한다. 그게 그에겐 큰 문제다. 그에겐 죽음조차 1등이어야 한다. 


이 문제가 리건 톰슨에게 더욱 심각한 이슈인 것은, 그가 한때 정말로 그 정점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약 20년 전, 그의 '버드맨' 캐릭터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1992년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금은 그저 퇴물 배우, 그것도 이젠 연극계로 넘어가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자 애쓰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 가졌던 그 모든 것들의 잔상이 그에게서 쉽게 사라질 리 없다. 그것이 그에게 환청으로 들리고 환상으로 보인다. 환청은 그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었지만, 가짜 배우들에게 왕국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다시 영화판으로 복귀해 그 자리로 돌아가자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버드맨'은 그의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 그를 계속해서 충동질한다. 

리건이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망상증이라기보다는 '분열증'에 더욱 가깝다. 리건은 그 망상이 망상일 뿐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버드맨이라는 낡은 자아가 폐기되기를 원한다. 그의 거울에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이란 문구가 일종의 방어적인 자기최면처럼 써져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버드맨 자아를 스스로부터 떼어놓자고 하는 시도이지만, 그것은 결국 시도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what is said of him'이니깐. 그는 버드맨 자아로부터 도망가는 것과 끌려가는 것을 매 순간과 매 판단에서 반복한다. 애와 증이 동시에 발현한다. 그토록 싫어하는 버드맨 자아마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연극은 그런 버드맨과 리건 톰슨 사이의 일종의 절충점이다. 그는 영화로 얻어지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상한 코미디 연기를 했고, 쫄쫄이 수트를 입고 새 우는 소리를 내면서 연기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갈망해왔다.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20년 전에 버드맨4 출연을 거절'했다.(비록 애석하게도 그 뒤에 버드맨 이후의 자아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에겐 무려 '레이몬드 커버'가 준 냅킨이 있다. '연기하는 사람'로서의 그의 자존심의 발화점이자 마지막 의존처다. 그도 알고 있다. 그가 결코 '예술인'은 못 된다는 것을. 그에게 이 연극이 그렇게 숭고하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혼한 전 부인이 '당신은 존경과 사랑을 혼동한다' 말해도, 딸인 샘이 '이건 예술이 아니라 아빠의 건재함을 알릴 목적일 뿐이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을 깔렸다' 라고 말해도, 비평가인 타비사 디킨슨이 '당신은 거만하고 이기적인 응석받일 뿐이며, 연예인일 뿐 결코 연기자는 아니다' 라고 말해도, 한마디 반박조차 하지 못한다. 그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아서. 
이 영화는 그런 그의 내면세계와 내적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로 우리는 그 미로 같은 그의 내면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그의 정신세계 속을 탐험하게 된다.




외줄 타는 삶, 떠밀려진 무대


연극은, 어찌 되었건 그가 인생을 걸고 성공시켜야 하는 그 연극은, 애석하게도 그리 순탄하게 풀려나가지는 않는다. 위기는 파도처럼 계속해 닥쳐오고, 그의 삶은 끊임없이 망할 듯 망하지 않는 모양으로 이어진다. 답이 안 나오는 배우를 해고하고 위기가 닥쳐오자 '우리가 원하는 그런 배우가 우리 언제 시작해요? 하면서 찾아오는' 경우도 생기고, 그렇게 지랄 맞던 마이크도 결국 어떻게든 통제 하에 들어오고, 취소해야 할 법하던 프리뷰도, 옷이 끼어서 망할 것 같던 프리뷰도, 극복 뒤에는 위기가 닥쳐오고 또 닥쳐온다. 삶이 외줄을 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리건은 위기를 극복하며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쇠약해진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연극을 할 자신이 없다. 그는 점점 이 연극이 두려워진다. '피곤해서 더 이상 못하겠다' 라는 그의 고백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연극을 어떻게든 취소하고 뒤로 미뤄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는 또 없다. 그는 이제 그 끝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그리고 그가 점점 쇠약해지는 그 틈을 타서 버드맨이 속삭여온다. 
외줄 타는 정신의 리건 톰슨이 끝내 맞이하게 된 것은 마이크가 '절대적인 존재'라고 묘사한 타비사 디킨슨이다. 리건 톰슨은 타비사 디킨슨에게 어떻게든 어필해보려 시도하지만, 그녀는 그를 꿰뚫어보고, 결론을 낸다. 'I'm gonna kill you play,' 그 한마디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연극이 삶 같고, 이 삶이 연극 같음을



[버드맨]에는 삶과 연극을 서로에게 빗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리건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데, 마지막 프리뷰를 끝낸 뒤 샘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리건은 '이 연극은 내가 살아온 기형적인 삶의 축소판 같아... 끊임없이 작은 망치로 불알을 얻어맞는' 이라 자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리건 톰슨이 타비사 디킨슨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에 나오는데, 한 3류 배우가 길거리에서 연습하던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연극 [맥베스]에 나오는 맥베스의 독백의 일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첫 번째 비유에서 그가 언급하는 그의 연극의 2부에서 그는 '에디'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에디'는 리건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극중극에서 에디는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했으며(리건 역시 평생 사랑과 인정을 구걸해왔다), 그 사랑을 위해서 '매 순간 내가 아닌 남자가 되어야 했다'고(배우는 매 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직업이다) 고백한다. 그리고 테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I don't exist)' 라 결론을 내리며(샘이 리건에게 'You don't exist. It's not important, you are not important, get used to it' 이라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자살한다. 결국 그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그리고 얻지 못할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성의 단절이 바로 삶의 종결이므로. 
두 번째 복선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리건 톰슨의 삶에서의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는 이제 'dusty death'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는 이제 'heard no more'하기에, 사라져야 할 존재일 뿐이고, 그가 그동안 살아왔던 것은 그저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할 뿐이다. 그렇게 요란한 삶을 살고, 감정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던 그의 삶은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두 비유는 아주 직접적으로 같은 결론, 바로 리건 톰슨의 자살을 암시한다. 타비사 디킨슨의 발언 앞뒤로 이 비유가 배치된 것은 언제 자살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리건 톰슨의 삶이,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진 지경으로 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이크가 요구한대로 리건 톰슨은 '장난감 같은 총이 아닌 진짜 총'을 준비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로 죽는 것뿐이다. 



From Birdman to [ ]


버드맨의 유혹과 리건 톰슨의 망상은 그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버드맨의 유혹이 최고조로 오르고, 리건 톰슨은 날아오르는 환상 속에 부유한다. 지나가던 행인이 소격효과처럼 그를 깨워주지만 그는 다시금 그 유혹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리건 톰슨은 결코 그 유혹에 넘어갈 수도 없고 그러나 그 망상에서 헤어 나올 수도 없다. 버드맨의 유혹이 그에게 더 깊게 들어올수록, 그는 스스로가 더욱 약해지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과도 같은 실패가 기어오고 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어떻게든 쌓아보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곧 무너지는 것만을 남기고 있다. 
극한의 긴장에서 리건 톰슨의 선택은 자살이다. 그는 버드맨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이 다가올 실패를 극복해낼 수도 없다. 그의 선택은 말 그대로 '날아오르는' 것, 바로 자살이다. 그가 무대를 죽을 장소로 고른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리라. 그렇게 리건 톰슨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이 자살이다. 그의 '죽음을 불사한 연기'에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쳤고, 가장 먼저 극장을 뜬 타비사 티킨슨도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라는 비아냥 가득한 호평을 남겨주었다. 이제 리건 톰슨은 '전설'이 되었다. 리건 톰슨은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이제 더 이상 그를 짓누르는 중압감과 긴장감으로 고통 받지 않게 되었고, 버드맨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버드맨 가면처럼 생긴 얼굴 지지대를 떼어버린다. 버드맨 자아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리건 톰슨은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결말부분의 모호함을 조금 풀어내보자면, 일단 리건 톰슨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건 맥락적인 부분과 그 장면 내적인 부분에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장면 내적으로는, 리건 톰슨이 창밖으로 나가는 그 모습과 표정은 결코 자살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리건 톰슨은 무대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까지 머뭇거리고,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리건 톰슨이 창밖으로 나갈 때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훌쩍 밖으로 나선다. 사람은 결코 그렇게 단호하고 신속한 자세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설령 그 사람이 어젯밤에 자살시도를 했다 실패한 사람일지라도. 샘의 표정변화와 시선처리는 같은 결론을 강화시켜주는데, 샘은 열린 창문을 보고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껴 창 밖-아래를 살피지만,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창 밖-위로 시선을 점차 올리고 표정과 자세의 긴장을 푼다. 적어도 리건 톰슨이 자살을 해서 죽었다거나, 또는 '해방되어 승천하는 리건 톰슨의 영혼을 보고 샘이 안도감을 느꼈다'(필자는 실제로 이런 결론을 내린 블로그 포스팅를 읽은 적이 있다!) 라는 것이라면 샘의 마지막 행동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맥락적인 측면에서는, 리건 톰슨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 왜냐면 그는 이제 그가 원하는 것들을 결국 가지게 되었으니깐. 다시 그는 명성과 존경을 가지게 되었고, 그 모든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깐. 오히려 리건 톰슨이 마지막으로 느꼈을 감정은, 깨달음과 비슷한 유의 감정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자신이 그렇게나 원하던 그것을 '벌어내었(earn)'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어쩌다보니' 그것을 얻게 되었다. 그냥 얻어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국에 가지게 된 그가 그 사실로 인해서 정말 성취감을 느끼고 기뻐했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그 평생에 걸쳐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스스로의 정신을 혹사시키며 이루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그는 깨닫게 된다. '해탈'이다. 

*'날아올랐다' 라는 그 영화적 표현이 거북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강박으로 인함인데, 그 강박은 '영화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적이지 않은 부분은 영화 내부에서 설명이 되거나 해야 한다는(버드맨이 판타지이거나, 또는 일관되게 리건 톰슨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의). 그러나 이 '날아올랐다'는 것은 그냥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본다면, 그렇게 이상하고 납득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예컨데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눈물 급류에 떠밀려 아이가 태어났다'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그게 말이 된다면, 리건 톰슨이 날아오르는 것도 말이 된다). 



[버드맨]의 영화적 성취



[버드맨]의 몇 가지 영화적인 성취 중 하나는, 모든 장면이 칼같이 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영화는, 촬영을 먼저 하고(프로덕션) 그 뒤에 편집(포스트 프로덕션)을 한다. 한참 찍어내고 그 중에서 불필요한 부분과 필요한 부분을 나누어 자르고 붙이고 사운드를 입히고 특수효과를 넣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버드맨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있다. 버드맨은 몇 십 분간의 연극적인 롱테이크를 찍어내기 위해 동선과 연기와 장면전환과 음향까지 모든 것을 다 촬영 전에 계산한 뒤에 촬영했다.(실제로, 엠마 스톤의 경우는 걸음걸이 속도 맞추기에 실패하여 NG를 여러 번 냈다고 한다. 걷는 속도까지 칼같이 미리 계산해놓고 찍었다는 얘기다.)가 실제로 포스트 프로덕션이 프로덕션에 선행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찍어낸 것이다. 
또 하나의 성취는 형식과 내용의 일치이다. 영화는 '연극적인 롱테이크'로 연극에 대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미로 같은 리건 톰슨의 내면을 미로 같은 세트장 뒤편을 통해 그려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심리상태를 똑같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울리는 재즈 드럼으로 풀어나간다. 이런 것들 또한 사전에 모든 요소들을 계획하고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들이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짜인 영화라는 말이다. 
 감독은 영화를 찍기 전에, 스태프와 배우들을 모아놓고 외줄 타는 곡예사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영화를 찍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와 스태프들은 결국 그런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이고, 인상적이며, 지적인 방법으로. 그러니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4개의 상(감독, 작품, 촬영, 각본)을 쓸어 담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Posted by 혼자노는 안



스파이(2015) 리뷰


1. 이쯤되면 이건 첩보물이라기 보다는

올해는 신선하고 괜찮은 스파이 영화가 벌써 두개나 나왔습니다. 첫번째는 매너의 중요성을 전국에 설파해준 [킹스맨]이고요, 두번째는 매너따윈 개나 줘버린 [스파이]입니다. 둘 다 기존의 스파이 영화를 비틀어버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물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전자가 '유머러스한 스파이 영화' 였다면, 후자는 '첩보물의 탈을 쓴 코미디영화'에 가깝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네요. 영화 시작한지 2분이면 벌써 웃기기 시작하고, 그 뒤로는 끊임없이 터집니다. 


2. '몸'보다는 '입담'으로

[스파이]의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 '상황'이지만, 이야기의 매력은 '캐릭터'와 '입담'에 있습니다. 뚱뚱한 캐릭터가 으레 보여주는 슬랩스틱류의 코미디(예고편에 나온 바이크 씬 같은) 나 자기비하개그는 되려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그러나 뻔하지만은 않은) 캐릭터들을 설정해놓았고, 그 캐릭터들간의 조합에서 입담이 터져나오게끔 해놨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기존의 것에서 약간 비틀어진 정도일 뿐이고, 그보단 그 판 위에서 놀고있는 캐릭터들을 바라보는게 재미있는 겁니다. 영화의 메인 톱니바퀴가 되어준 수잔 쿠퍼도 멋졌지만, 제이슨 스테이섬의 필모 셀프디스에 가까운 그런 캐릭터로 보이는 릭 포드나 어딘가 묘한 백치미가 느껴지던 파인(주드 로), 또는 수잔과 쌍욕으로 점철된 시스터후드를 보여준 '레이나' 역시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최고의 조연은 끊임없이 끈적한 섹드립을 던지는 '알도'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영화가 SNL이라면 '알도'는 신동엽이었으니깐요. 


3. 액션도 꽤 괜찮다

영화의 주된 포인트는 입담이지만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액션은 크게 다른 첩보나 액션영화들에 비해서 크게 모자라는 부분이 없습니다. 특히나 수잔 쿠퍼와 다른 여자 요원의 주방 격투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상당히 잘 짜여진 액션씬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일상적인 도구를 들고 싸우는 액션들([베를린]에서 냉장고 열어 통조림 집어들고 패는 장면이라거나, [본 슈프리머시]에서 잡지 돌돌 말아서 싸우는 장면 같은거요) 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도심 추격씬이나 헬리콥터에서의 스턴트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4. 첩보물과 벡델 테스트

'벡델 테스트' 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테스트인데, 이 테스트는 어떤 한 영화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테스트입니다. 테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나오는가? 
2. 남성이 '배제된'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가? 
3. 대화의 소재가 남성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아주 간단한 테스트이지만, 정작 따지고보면 이 간단한 기준조차 못넘는 영화가 많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최근의 가장 큰 히트작인 [어벤져스2]에서도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는 겨우 셋(마리아 힐, 닥터 조, 블랙 위도우) 뿐이었고, 그 중 둘이 남자 없이, 또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 없이 이야기하는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단 [어벤져스2]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량]이라거나, [위플래쉬] [킹스맨] 같은 영화들 마저도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영화들이 나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여성은 부수적이거나(이름조차 없는) 종속적인(다른 남자주인공과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부분으로만 여겨졌다는 것이죠.(저는 그것이 '배제'적으로 행해졌다기보다는 그저 '누락'되었을(순전한 무사유였을 뿐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찌되었건 이런 '누락적인' 태도는 결론적으로는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의 부재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첩보 영화 :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시리즈] [007 시리즈] 등 에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피터지게 싸우고 승리를 쟁취하여 이야기의 핵심에 서게 되는 것은 대부분은 남자입니다. 여자는 본드걸처럼 섹스어필이나 하면 그만이었으니깐요. 

그런 맥락에서 [스파이]는 첩보물의 역사에서 인상적인 포지션을 점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최근 개봉한 [매드맥스]도 상당히 페미니즘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흥미롭군요) 비록 작위적으로 클리셰를 파괴하고자 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 작위적이고 과장된 부분조차 하나의 '재미'로 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네요. 


5. 첨부하는 동영상 링크는 파리에서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사람들이 부르고 있었던 노래입니다. 저 해괴한 것은 시발 무엇일까 했는데 실제 있는 노래라는군요. 충격과 공포입니다. 내용물은 더욱 충격적이고 흥겨우니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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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 리뷰

- How to Embrace your emotions


1. 픽사의 장기가 돋보인 영화였습니다. 뇌의 기능 하나 하나를 의인화한다는 발상 자체는 전에도 있었던 것이지만(우디 앨런의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sex나), 전에 있었던 발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되려 발상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전개해내느냐가 중요하니깐요. 픽사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강점이 있는 회사입니다. 신선한 소재를 가져와 구체적이고 탄탄한 설정을 구축하고, 그 위에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짜내어가는 건 픽사의 전문분야죠. [인사이드 아웃]도 바로 그런 픽사의 장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2. 영화는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감정들을 각각의 캐릭터로 그려냅니다. 관객들은 라일리의 감정들이 벌이는 소동을 바라보면서 라일리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요. 말을 만들어 보자면, 관객들의 시선은 라일리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라일리의 뒤에서 보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뒤통수에서 바라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구조는 굉장히 영리한 시점 설정입니다. 인물의 세세한 '감정선'을 한올 한올 끌어내어서 보여주게 되니깐요. 우리가 보통 영화를 볼 때는, 인물의 발화/표정/상황 등의 부수적인 정보를 통해서 인물의 감정을 '유추'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놓치는 사람들도 많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고, 감정선 자체를 못따라오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의 시점구조는 이런 감정선을 감춤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인물의 내적갈등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쉬워지는 거죠.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공감도 쉬워집니다. 공감이 쉬워지면 몰입도도 높아지고요. 그렇게되면 이 이야기는 라일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겁니다. 이제 이건 '나'의 이야기입니다. 감정 뒤숭숭하던 어린 시절과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3. 이 영화는 우리에게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기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심이도, 까칠이도, 버럭이도 그리고 하다못해 가장 쓸모없어 보였던 슬픔이도 다 각자 할 일이 있고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죠.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진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고 싶네요. 저는 이게 유교문화의 영향인건지 아니면 청교도적인 문화의 영향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적인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고, 열등한 것이고, 억눌러야 하는 그런 것인것처럼 대하는 분위기를 말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사내새끼가 운다' 같은 표현이요. 아니면 '화병'이나, '한' 같은거요. 화를 내야하는 데 내지를 못하니깐 울화병이 생기는 거고, 슬퍼해야하는 데 슬퍼하질 못하니깐 한 같은게 생기는거죠.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니깐. 화내지 말아야하고, 웃어야하고, 둥글둥글하게 살아야하고. 그렇게 '기쁨'이 강제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이드 아웃]이, 그리고 이 영화의 인기몰이가 저는 반갑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솔직해지는 것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테니깐요. 단순히 감정을 찍어 눌러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해 더 잘 바라보고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역시 더 잘 이해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이 사회가 좀 더 부드러워지고, 사람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 많은 사람들이 '빙봉'이가 사라질 때 울었다고 하던데, 저는 그보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사온 첫날 밤 자기 전의 장면이 기억에 더 남았습니다. 라일리의 감정들이 우글우글 들끓다가 터지려는 그 순간에, 부모님이 칭찬해주시는 장면이요. 그럴 때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참 서운하잖아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나를 버텨내고 있는데, 머리 속에 만감이 교차하고 금방이라도 끓어넘칠 것 같은데, 대부분의 경우 말 한마디 못듣곤 하죠. 그게 그냥 당연하다는 듯 넘어가지는 경우도 많고요. 바로 그럴 때에 이렇게 수고했다고 인정하고 칭찬받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건 상대방이 그만큼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뜻이 되고, 나는 상대가 그만큼 나를 챙긴다는 것을 알게 되죠. 아이들은 그런 관심과 사랑으로, 그리고 힘든 것을 이겨낸 뒤의 칭찬으로, 성장합니다. 


5. 누군가가 이거 아카데미 올라가지 않겠느냐 하던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카데미 할배들의 취향 상 이번에도 물론 본상은 못받겠지만요. 아무튼 만약 그렇게 된다면 피트 닥터는 두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가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겁니다. 애니메이션이 그저 유치한 무언가가 아니라, 실사 영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하나의 독립 작품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라따뚜이]에서 나오듯, Not anyone can become a great artist, but a great artist can come from anywhere 한 거니깐요. 그리고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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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베테랑] 리뷰

유쾌함과 역겨움의 정반합



1. 류승완은 역시 류승완이다


[베를린] 류승완 감독의 신작입니다. 그래도 류승완 감독이 우리나라에선 액션 제일 잘 찍는거 같아요. [베를린]에서도 냉장고 열어서 통조림으로 찍어 팬다거나 하는 그런 '일상적 소품을 이용한 액션'을 잘 보여줬었죠. 이번 [베테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도구, 소품, 주변 지형지물들을 이용해서 싸우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모든 것들이 액션 안으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첫 장면인 자동차 작업장(?) 안에서의 액션도, 온갖 자동차 소품들과 자동차 문짝까지 이용해서 열심히 액션을 꾸려내죠. 마지막 길거리 싸움(설정 상 명동, 촬영은 청주)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발차기를 문짝으로 막아 반격하고, 넘어지면서 돌에 머리가 찍히고 하는 장면들(그거 진짜 아파보였는데. 관객들이 다들 헙! 소리 내더라고요)을 통해 배경과 연기가 더욱 긴밀해지게 됩니다. 액션의 변칙성과 역동성도 증가하게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류승완 감독의 액션 영화가 저는 좋습니다. 


2. 유쾌함과 역겨움의 대조


영화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유쾌한 느낌입니다. 오달수의 입담과 개그가 계속해서 터지고(유해진이 입담캐릭인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황정민에게서는 진한 쌈마이향과 열혈정의바보의 냄새가 동시에 풍깁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나쁜놈들을 모아놓은 뒤 쓸어 패 담고, 그 장면들을 거칠지만 여전히 발랄하게(역시 권선징악은 기분이 좋습니다) 그려냅니다. 말 그대로 '돈은 없지만 가오는 살아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쭉 유지됩니다. 뭐랄까, 영화를 보다보면 이 사람들이 별로 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 유쾌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그려지는 '폭력'(비물리적인 폭력들도)의 수위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가정교육 잘못받은 재벌 3세가 벌일 수 있는 것들을 거의 종합선물세트로 모아놓는 다는 느낌입니다.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그 폭력들은, 단순히 '아 저새끼 나쁜새끼'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자신이 어떠한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을 행하는, 지극히 권력(이자 자본)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폭력들입니다. 가장 비열한 폭력이죠. 이건 정말이지 '역겹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런 폭력들을 날 것의 느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볍고 유쾌한 느낌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유쾌함이 이 역겨움을 희석시켜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결국 조태오가 잡히잖아요. 우리는 악인의 몰락을 바랍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 폭력을 견뎌낼 수가 없어요. 


3. 유치함에 대한 정당성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전체적으로 가볍고 유쾌하기에 그런 자극적인 폭력의 장면들을 넣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영화는 아주 유치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감 넘치는 착한 형사가 악당 때려잡는 구조거든요. (요즘은 히어로물도 그런식으로 안만들어요.) 결국 이 유치한 이야기를 좀 더 무거워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 필요하죠. 그렇기에 일부러 저런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대놓고 보여주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악질의 개 씨발 새끼를 후드려 패러 가는거다 라는 걸 열심히 관객들에게 어필하는거죠. 일종의, 이 유치한 이야기에 대한 정당성이죠. 


4. 영화를 영화로 끝낼 수 없음에


자 이제 조태오는 잡히고, 배기사님은 깨어나셨습니다. 나쁜놈은 잡혔고,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다친 사람은 부지기수지만)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될것만 같은 분위기와 함께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영화를 영화로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죠. 
가장 그렇게 되지 않는 부분은, 서도철(황정민) 같은 형사는 굉장히 없을 법 하고, 조태오 같은 재벌3세는 굉장히 있을 법 하다는 겁니다. 현실에 과연 저런 사람이 존재 할까? 재벌그룹을 상대로, 온갖 외/내부에서 오는 압박들을 다 x까버리고, 그저 달려들어서 다 까부수는 저런 형사가 있을까 생각하면 아주 아닐 것 같다는 거죠. 하지만 인격 파탄에, 약쟁이에, 약자에게 한없이 잔인하고 비열한 어떤 재벌3세가 있을까 생각하면 대한민국에 뭐 저런 인간이 없지는 않을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뭔가 찝찝한 부분이 남습니다. 비록 영화는 아주 쿨하게, 더이상 할 말이 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지언정 말입니다. 


5. 그리고 유아인...!


이 영화를 맛깔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유아인입니다. 유아인의 평소 언행을 생각해본다면 이 조태오 캐릭터는 아마 유아인이 가장 본받고싶지 않은 캐릭터일겁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유아인은 이 캐릭터를 밉상(밉상은 좀 귀여운 단어같지만은)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그 유아인이 짓는 표정들이 진짜 재수가 없습니다. 그 하늘 아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 표정. 어차피 내가 이길 거지만, 그냥 잠깐 놀아주겠다는 그 표정. 진짜 쌍욕이 절로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한국판 울프 오브 더 월스트리트의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생각하셔도 될거에요. 심지어 캐릭터 머리스타일도 닮았습니다(!) 황정민 오달수 유해진(유해진이 오달수 배역을 했었어도 잘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되려 그간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그게 더 비슷해서) 연기 잘하는거야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유아인이 이 캐릭터를 이정도로 소화해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서 더욱 놀라운 감이 있네요. 앞으로도 많이 기대가 됩니다.

Posted by 혼자노는 안



[사도] 리뷰


영화 [사도]의 힘은 익숙함에 있다.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사도세자와, 그것을 명령한 영조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굳이 이 이야기를 설명하거나, 관객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영화를 관객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원하는대로 장면을 그려낸다. 매 장면 장면이 감정의 극단으로 치닫아도 이야기는 여전히 견고함을 유지한다. 그 견고한 기반 위에서 사도세자의 한맺힌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아버지'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성군'으로 불리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왕은 아니었다. 취약한 기반으로 시작했으나, 운과 노력과 협상과 균형을 통해 왕의 자리를 확보하고 유지해왔다. 일종의 '자수성가'라고 해도 될 수 있으리라. 이 위대한 아버지 아래에 총명하지만, 아버지만큼은 못한 아들의 삶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자신은 그보다 잘났었기에. 자신은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부했었으나 더 좋은 성과를 냈었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받고도 그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아들이 그저 모자라 보일 뿐이다. 
아들에게는 그래도 아버지에게 잘 보여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다. 이 양가적인 감정이 대립하고, 결국 분열한다. 그것이 아들이 '미친 세자'가 된 경위이다. 



[사도]의 핵심은 이 이야기가 오롯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영화는 내내 그 단순함과 순전함을 유지해간다. 정쟁도, 모략도 배제한 가족 드라마이다. 재조명이자, 정석으로의 회귀이다. 왕이고자 한 아버지와, 자식이고자 한 세자의 이야기. 세자를 원했던 왕과, 아버지를 원했던 아들의 이야기. 엄격한 아버지와 미쳐버린 아들의 이야기이다.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영화 [사도]가 우리 세대에까지 울림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함'으로부터 기인한다. 왕과 왕자의 이야기를, 어느 부자간에나 있을 수 있는, 아니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파더 컴플렉스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왕가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바뀌는 지점이다. 
그렇게 우리도 이 이야기의 한 일부가 된다. 자수성가해서 자존심 강한 아버지와 그 기대에 충족하지 못하는 아들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운다. 88만원 세대밖에 되지 못한 이들이 울고, 잘 먹이고 학원 다 보내주고 공부시켰으나 '이것 밖에' 되지 못한 이들이 운다. 세상은 냉정하기에 우리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만 배워왔던 이들과,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던 이들이 운다. 저 한 서린 눈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같이 흘린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한가.

간단하고 강력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견인차로는 명배우 송강호와 유아인이 있다. 유아인의 광기와 한 서린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베테랑]에 이어 또다시 극단적인 캐릭터(둘 다 컴플렉스가 가득하고 폭주하는 청춘이라는 점에 있어 공통점이 있다)를 연기해 내었으나, 유아인은 여전히 보여주고 싶은 것이 더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송강호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따져보면 꽤나 제한적인 배역들을 해왔다는 점을 우리에게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는 그 제한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에 대해서 역시 깨닫게 한다. 어린 정조 배역을 맡았던 아역 이효제군은 이름을 기억하게 할만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조는 아버지의 부채를 들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 앞에서 재롱을 부리겠다며 부채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은 이 춤사위 장면을 '세대갈등의 치유'로서 삽입하였다고 말하였다.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과거를 딛고 미래로 향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장면의 인상이 감동보다는 느슨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강렬하고 긴박하게 시작한 첫 장면과 영화 내내 팽팽하던 긴장감을 같이 생각해 볼 때 더욱 아쉬워지는 장면이다.


p.s. 유아인의 이 '억울한' 표정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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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장이 맷 데이먼의 화성에서 살아남기

- 이토록 산뜻한 인간 찬가를 보았는가



 근 미래, NASA는 화성에 유인 탐험대를 파견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부득이한 이유로 급하게 철수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대원을 두고 가야만 했다. 하지만 마크 와트니 대원은 바이탈 신호기가 고장 난 채 살아있었고, 그는 화성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 와트니 대원은 화성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하고, NASA는 와트니 대원을 살리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화성으로 구조대를(아니면 적어도 식량이라도) 보내야한다. 영화 [마션]은 화성과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거대한 스케일 속에서 빛나는 인간 정신력의 극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런 종류의 영화라면 대개 웅장하고 진지하고 심각하고 긴박감이 철철 넘쳐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이다. 최근 우주를 배경으로 하여 나왔던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정 반대로, [마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마크 와트니는 시종일관 입을 놀리고, 농담을 던지고, 누가 볼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연구소 캠을 보며 기록을 남기고, 개드립을 친다.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는 백인 남성 캐릭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션]은 질척거리지도 않고, 최루성 감동장면 하나 넣지 않은 채 끝까지 간다. 이쯤 되면 '산뜻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한_화성표류자의_식물덕질)

 이렇게 유쾌하고 산뜻한 분위기에서 조명을 받는 것은 ‘과학’과 그것을 향한 과학/공학자들의 열망이다. 주인공인 마크 와트니에게는 화성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만큼이나 화성에서 최초로 경작을 하게 되었다는 흥분감이 큰 것으로 보인다. 화성에서의 경작이라니! 천문-공학-식물학자로서 평생 꿈꿔왔던 것을(마크 와트니는 심지어 그것에 대한 

논문까지 썼다) 해볼 기회가 우주 최초로 주어진 것이니, 바로 이것이 로망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과학자들의 로망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패스파인더이다. 최초의 화성 탐사 로봇인 패스파인더·소저너는 그 자체로서도 무수한 천문덕후들의 로망이었으며, 그것을 발굴해내는 마크 와트니/빈센트 카푸어의 모습은 사뭇 잊힌 고대 비밀병기를 꺼내오는 듯하다. 화성-지구간의 16진법 아스키코드 통신이나, 지구 중력을 그대로 이용해 헤르메스호를 돌려보내는 방법을 연구한 리치 퍼넬이나, 지구에서 먼저 로버를 개조해보고 화성에 그대로 알려주는 JPL 연구팀의 모습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책들을 과학자들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희열감이다. 이를 과학에 대한 열정이라 불러도, 혹은 '덕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마션]은 과학적임을 자처했었던 [인터스텔라]보다 [마션]은 더욱 과학적인 영화가 된다. 





 

 [마션]은 단순히 '과학영화'로 끝나지 않는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화성의 풍경을 인간의 눈높이에서 조명하고, 그를 통해 화성의 광활함과 거기에서 오는 막막함까지도 보여준다. 이 넓고 황무한 행성에서, 작은 인간인 마크 위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마크 위트니는 하루에 겨우 몇 시간 이동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로버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슈트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며, 혹여나 폭발사고라도 날 경우 무력하게 화성산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며 질식사하게 될 것이다. NASA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행성 간 이동에 걸릴 날짜를 줄일 방법은 없다. 지구도 화성도 인간이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것들로, 그저 상수로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자연은 광대하고 압도적이며, 인간은 미약하고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마션]은, 여기에서 상수가 아닌 변수에 집중한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한 문제 한 문제씩,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태도는 다름 아닌 '성실함'이다. 어떤 요행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운에 맡기는 것도 아닌 성실함. 끊임없이 데이터를 분석해나가고([마션]에서는 유독 숫자로 된 데이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이 문제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공학적인 방법으로 개선해나간다. 
 마크 위트니는 화성 조난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유일하게 타는 것이라며, 십자가상을 불태워 연료로 써 버린다. 마크 위트니가 십자가상을 보며 'I'm counting on you'라 농담한 것은 전적으로 신이나 다른 요행에 의존한 적조차 없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다. 이 노골적인 장면은 되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살라딘’을 연상시킨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이슬람권의 수장으로 나오는 살라딘은 철저한 인본주의자로서, '전투의 결과는 신에게도 달렸지만, 군사들의 준비, 숫자, 건강과 식수의 보급에도 달렸다'고,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죄 때문이 아닌,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감자의 숫자를 세고, 비닐을 치고 흙을 퍼오고, 하루 이동가능 거리를 계산하며 생존을 위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마크 위트니의 모습이 이와 닮아있다. '요행'을 통해 어떻게든 발사일을 앞당기려 했던 NASA국장이 보기 좋게 실패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인류는 요행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션]을 과학에 대한 찬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찬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인간찬가'라는 표현은 [마션]과 어째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질 않는다. 왜냐면 마크 위트니는 시종일관 웃고 떠들고(주로 혼자) 농담을 던지고, 흥분하면 쌍욕을 퍼붓고, 자신을 구하러 온 대장에게도 만나자마자 '음악 취향이 너무 구리다' 농담을 던지니깐. [마션]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며 즐기지 않아도, 장중함과 위대한 무엇을 생각하지 않으며 봐도 좋을 영화이니깐. [마션]은 그런 영화다. 이 모든 내용이 거북하거나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 괜스레 각 잡고 감동 짜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 산뜻하고 유쾌한 인간찬가라는 점. [마션]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Posted by 혼자노는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