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WO안선생님


[버드맨] 리뷰 


정점에 서야만 하는 그 남자에 관하여


모든 남자에게는 세상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모종의 욕망이 있다. 리건 톰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이나 집착에 가까운 수준의 욕망이 있다. 그는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이 자기의 반도 안 되는 재능으로 자신보다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을 보면 분노가 끓어오른다. 비행기 사고로 죽느냐 마느냐의 순간에 '앞좌석에 앉은 조지 클루니가 나를 제치고 1면에 나올 텐데' 라는 고민을 한다. 그게 그에겐 큰 문제다. 그에겐 죽음조차 1등이어야 한다. 


이 문제가 리건 톰슨에게 더욱 심각한 이슈인 것은, 그가 한때 정말로 그 정점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약 20년 전, 그의 '버드맨' 캐릭터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1992년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금은 그저 퇴물 배우, 그것도 이젠 연극계로 넘어가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자 애쓰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 가졌던 그 모든 것들의 잔상이 그에게서 쉽게 사라질 리 없다. 그것이 그에게 환청으로 들리고 환상으로 보인다. 환청은 그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었지만, 가짜 배우들에게 왕국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다시 영화판으로 복귀해 그 자리로 돌아가자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버드맨'은 그의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 그를 계속해서 충동질한다. 

리건이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망상증이라기보다는 '분열증'에 더욱 가깝다. 리건은 그 망상이 망상일 뿐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버드맨이라는 낡은 자아가 폐기되기를 원한다. 그의 거울에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이란 문구가 일종의 방어적인 자기최면처럼 써져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버드맨 자아를 스스로부터 떼어놓자고 하는 시도이지만, 그것은 결국 시도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what is said of him'이니깐. 그는 버드맨 자아로부터 도망가는 것과 끌려가는 것을 매 순간과 매 판단에서 반복한다. 애와 증이 동시에 발현한다. 그토록 싫어하는 버드맨 자아마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연극은 그런 버드맨과 리건 톰슨 사이의 일종의 절충점이다. 그는 영화로 얻어지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상한 코미디 연기를 했고, 쫄쫄이 수트를 입고 새 우는 소리를 내면서 연기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갈망해왔다.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20년 전에 버드맨4 출연을 거절'했다.(비록 애석하게도 그 뒤에 버드맨 이후의 자아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에겐 무려 '레이몬드 커버'가 준 냅킨이 있다. '연기하는 사람'로서의 그의 자존심의 발화점이자 마지막 의존처다. 그도 알고 있다. 그가 결코 '예술인'은 못 된다는 것을. 그에게 이 연극이 그렇게 숭고하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혼한 전 부인이 '당신은 존경과 사랑을 혼동한다' 말해도, 딸인 샘이 '이건 예술이 아니라 아빠의 건재함을 알릴 목적일 뿐이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을 깔렸다' 라고 말해도, 비평가인 타비사 디킨슨이 '당신은 거만하고 이기적인 응석받일 뿐이며, 연예인일 뿐 결코 연기자는 아니다' 라고 말해도, 한마디 반박조차 하지 못한다. 그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아서. 
이 영화는 그런 그의 내면세계와 내적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로 우리는 그 미로 같은 그의 내면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그의 정신세계 속을 탐험하게 된다.




외줄 타는 삶, 떠밀려진 무대


연극은, 어찌 되었건 그가 인생을 걸고 성공시켜야 하는 그 연극은, 애석하게도 그리 순탄하게 풀려나가지는 않는다. 위기는 파도처럼 계속해 닥쳐오고, 그의 삶은 끊임없이 망할 듯 망하지 않는 모양으로 이어진다. 답이 안 나오는 배우를 해고하고 위기가 닥쳐오자 '우리가 원하는 그런 배우가 우리 언제 시작해요? 하면서 찾아오는' 경우도 생기고, 그렇게 지랄 맞던 마이크도 결국 어떻게든 통제 하에 들어오고, 취소해야 할 법하던 프리뷰도, 옷이 끼어서 망할 것 같던 프리뷰도, 극복 뒤에는 위기가 닥쳐오고 또 닥쳐온다. 삶이 외줄을 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리건은 위기를 극복하며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쇠약해진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연극을 할 자신이 없다. 그는 점점 이 연극이 두려워진다. '피곤해서 더 이상 못하겠다' 라는 그의 고백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연극을 어떻게든 취소하고 뒤로 미뤄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는 또 없다. 그는 이제 그 끝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그리고 그가 점점 쇠약해지는 그 틈을 타서 버드맨이 속삭여온다. 
외줄 타는 정신의 리건 톰슨이 끝내 맞이하게 된 것은 마이크가 '절대적인 존재'라고 묘사한 타비사 디킨슨이다. 리건 톰슨은 타비사 디킨슨에게 어떻게든 어필해보려 시도하지만, 그녀는 그를 꿰뚫어보고, 결론을 낸다. 'I'm gonna kill you play,' 그 한마디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연극이 삶 같고, 이 삶이 연극 같음을



[버드맨]에는 삶과 연극을 서로에게 빗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리건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데, 마지막 프리뷰를 끝낸 뒤 샘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리건은 '이 연극은 내가 살아온 기형적인 삶의 축소판 같아... 끊임없이 작은 망치로 불알을 얻어맞는' 이라 자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리건 톰슨이 타비사 디킨슨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에 나오는데, 한 3류 배우가 길거리에서 연습하던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연극 [맥베스]에 나오는 맥베스의 독백의 일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첫 번째 비유에서 그가 언급하는 그의 연극의 2부에서 그는 '에디'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에디'는 리건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극중극에서 에디는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했으며(리건 역시 평생 사랑과 인정을 구걸해왔다), 그 사랑을 위해서 '매 순간 내가 아닌 남자가 되어야 했다'고(배우는 매 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직업이다) 고백한다. 그리고 테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I don't exist)' 라 결론을 내리며(샘이 리건에게 'You don't exist. It's not important, you are not important, get used to it' 이라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자살한다. 결국 그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그리고 얻지 못할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성의 단절이 바로 삶의 종결이므로. 
두 번째 복선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리건 톰슨의 삶에서의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는 이제 'dusty death'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는 이제 'heard no more'하기에, 사라져야 할 존재일 뿐이고, 그가 그동안 살아왔던 것은 그저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할 뿐이다. 그렇게 요란한 삶을 살고, 감정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던 그의 삶은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두 비유는 아주 직접적으로 같은 결론, 바로 리건 톰슨의 자살을 암시한다. 타비사 디킨슨의 발언 앞뒤로 이 비유가 배치된 것은 언제 자살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리건 톰슨의 삶이,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진 지경으로 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이크가 요구한대로 리건 톰슨은 '장난감 같은 총이 아닌 진짜 총'을 준비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로 죽는 것뿐이다. 



From Birdman to [ ]


버드맨의 유혹과 리건 톰슨의 망상은 그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버드맨의 유혹이 최고조로 오르고, 리건 톰슨은 날아오르는 환상 속에 부유한다. 지나가던 행인이 소격효과처럼 그를 깨워주지만 그는 다시금 그 유혹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리건 톰슨은 결코 그 유혹에 넘어갈 수도 없고 그러나 그 망상에서 헤어 나올 수도 없다. 버드맨의 유혹이 그에게 더 깊게 들어올수록, 그는 스스로가 더욱 약해지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과도 같은 실패가 기어오고 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어떻게든 쌓아보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곧 무너지는 것만을 남기고 있다. 
극한의 긴장에서 리건 톰슨의 선택은 자살이다. 그는 버드맨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이 다가올 실패를 극복해낼 수도 없다. 그의 선택은 말 그대로 '날아오르는' 것, 바로 자살이다. 그가 무대를 죽을 장소로 고른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리라. 그렇게 리건 톰슨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이 자살이다. 그의 '죽음을 불사한 연기'에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쳤고, 가장 먼저 극장을 뜬 타비사 티킨슨도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라는 비아냥 가득한 호평을 남겨주었다. 이제 리건 톰슨은 '전설'이 되었다. 리건 톰슨은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이제 더 이상 그를 짓누르는 중압감과 긴장감으로 고통 받지 않게 되었고, 버드맨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버드맨 가면처럼 생긴 얼굴 지지대를 떼어버린다. 버드맨 자아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리건 톰슨은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결말부분의 모호함을 조금 풀어내보자면, 일단 리건 톰슨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건 맥락적인 부분과 그 장면 내적인 부분에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장면 내적으로는, 리건 톰슨이 창밖으로 나가는 그 모습과 표정은 결코 자살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리건 톰슨은 무대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까지 머뭇거리고,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리건 톰슨이 창밖으로 나갈 때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훌쩍 밖으로 나선다. 사람은 결코 그렇게 단호하고 신속한 자세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설령 그 사람이 어젯밤에 자살시도를 했다 실패한 사람일지라도. 샘의 표정변화와 시선처리는 같은 결론을 강화시켜주는데, 샘은 열린 창문을 보고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껴 창 밖-아래를 살피지만,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창 밖-위로 시선을 점차 올리고 표정과 자세의 긴장을 푼다. 적어도 리건 톰슨이 자살을 해서 죽었다거나, 또는 '해방되어 승천하는 리건 톰슨의 영혼을 보고 샘이 안도감을 느꼈다'(필자는 실제로 이런 결론을 내린 블로그 포스팅를 읽은 적이 있다!) 라는 것이라면 샘의 마지막 행동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맥락적인 측면에서는, 리건 톰슨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 왜냐면 그는 이제 그가 원하는 것들을 결국 가지게 되었으니깐. 다시 그는 명성과 존경을 가지게 되었고, 그 모든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깐. 오히려 리건 톰슨이 마지막으로 느꼈을 감정은, 깨달음과 비슷한 유의 감정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자신이 그렇게나 원하던 그것을 '벌어내었(earn)'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어쩌다보니' 그것을 얻게 되었다. 그냥 얻어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국에 가지게 된 그가 그 사실로 인해서 정말 성취감을 느끼고 기뻐했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그 평생에 걸쳐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스스로의 정신을 혹사시키며 이루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그는 깨닫게 된다. '해탈'이다. 

*'날아올랐다' 라는 그 영화적 표현이 거북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강박으로 인함인데, 그 강박은 '영화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적이지 않은 부분은 영화 내부에서 설명이 되거나 해야 한다는(버드맨이 판타지이거나, 또는 일관되게 리건 톰슨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의). 그러나 이 '날아올랐다'는 것은 그냥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본다면, 그렇게 이상하고 납득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예컨데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눈물 급류에 떠밀려 아이가 태어났다'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그게 말이 된다면, 리건 톰슨이 날아오르는 것도 말이 된다). 



[버드맨]의 영화적 성취



[버드맨]의 몇 가지 영화적인 성취 중 하나는, 모든 장면이 칼같이 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영화는, 촬영을 먼저 하고(프로덕션) 그 뒤에 편집(포스트 프로덕션)을 한다. 한참 찍어내고 그 중에서 불필요한 부분과 필요한 부분을 나누어 자르고 붙이고 사운드를 입히고 특수효과를 넣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버드맨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있다. 버드맨은 몇 십 분간의 연극적인 롱테이크를 찍어내기 위해 동선과 연기와 장면전환과 음향까지 모든 것을 다 촬영 전에 계산한 뒤에 촬영했다.(실제로, 엠마 스톤의 경우는 걸음걸이 속도 맞추기에 실패하여 NG를 여러 번 냈다고 한다. 걷는 속도까지 칼같이 미리 계산해놓고 찍었다는 얘기다.)가 실제로 포스트 프로덕션이 프로덕션에 선행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찍어낸 것이다. 
또 하나의 성취는 형식과 내용의 일치이다. 영화는 '연극적인 롱테이크'로 연극에 대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미로 같은 리건 톰슨의 내면을 미로 같은 세트장 뒤편을 통해 그려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심리상태를 똑같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울리는 재즈 드럼으로 풀어나간다. 이런 것들 또한 사전에 모든 요소들을 계획하고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들이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짜인 영화라는 말이다. 
 감독은 영화를 찍기 전에, 스태프와 배우들을 모아놓고 외줄 타는 곡예사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영화를 찍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와 스태프들은 결국 그런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이고, 인상적이며, 지적인 방법으로. 그러니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4개의 상(감독, 작품, 촬영, 각본)을 쓸어 담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Posted by 혼자노는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