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 리뷰
관람일 3월 8일 @ 신촌 메가박스
한줄평 : '잊지 않음'의 음악, 무용, 문학, 그리고 종교. 그리고 그에 대한 '영화'
0. 신촌 메가박스에서 이런 걸 틀어주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튼 이런 철저하게 비주류적인 영화를 여러 의미에서의 주류가 넘치는 신촌에 보게 되다니 이상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네요.
제목의 '만신'은 '큰 무당'에게 붙이는 존칭입니다. '큰 스님'과 '중'의 차이쯤 되겠죠. 무속 보다는 무교라는 표현을 써달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교는 無교 같아서 좀 헷갈립니다. 전 그냥 무속이라고 쓰려고요. 비하적인 의미는 없고, 순수하게 효율의 차원입니다.
1. 영화는 좀 어렵습니다. 다른 것보다 영상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어렵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실제와 허구와 재현과 환상 그리고 영화 안과 밖을 마구 헤집어 놓습니다. 흐트러지고 흐려져서 결국 한 곳에 뒤섞이는 구조입니다. 부족하지만 굳이 해몽을 해보자면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고 한 곳에 모두가 뒤섞이는 굿판'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주류적인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이런 식의 다큐멘터리(결국 이 영화의 장르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는 처음입니다. 참신함이기도 하고 난해함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분명한 해석의 여지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껌은 씹을수록 단물이 빠지지만, 좋은 영화는 씹을수록 감상이 우러나오죠. 결론은 어렵지만 좋은 영화라는 얘기입니다.
2. 무속은 어쩌면 이제부터는 영원히 이해되지 못할 차원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여년 전만 하더라도 무속은 우리 민족의 '세계관'으로 존재해왔었죠. 그러나 그 백여년만에 무속은 미신이나 타파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태풍 같았던 근현대화의 과정에서 누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누락으로 인해 발전하지 못했던 무속은 전근대성과 초자연성, 그리고 한국사회의 불균형적 현대화의 상징이라는 멍에를 지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예로 '신과 함께'라거나 '싸우자 귀신아' 등에서 나타나는 무속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신과 함께'의 내용이나, '싸우자 귀신아'에서 등장하는 무속의 모습을 결코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판타지일 뿐이죠. 결국 무속은 허구의 배경 속에서 같은 허구의 입장으로 존재할 따름입니다. 비현실이고, 초자연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최대 장애물은 '판타지로서의 무속'을 '실제로서의 무속'으로 그려내는 것이 됩니다. 영화는 결코 무속이 허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속'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실존하는 인물인 김금화 만신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제로 그 김금화 만신을 이 영화에 출연시키는 입장에서, 결코 그 무속을 판타지로 그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허구로 말하는 순간, 그건 김금화 만신에 대한 모욕이 되니깐요.
3. 2번 꼭지에서 말했던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속인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신들에게는 세계관이었고, 실제였고, 평생의 업이자 한이었는데, 역사가 흐르면서 '미개' '허구' '빨갱이' '사탄 마귀'로 규정되어버렸으니깐요. 김금화 만신은 어렸을 때 부터 환영을 보고 신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태어날 때부터 그녀는 소수자였고, 자라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까지도 소수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소수자는 역설적으로 모두를 품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소수자라는 것과 모두를 품는다는 두 개념은 인과가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어찌되었건 김금화 만신의 삶에서 그 두가지 개념은 공존하였습니다. 아이러니인 셈이죠. 이런 '소수자 관점'은, 무당은 신과 인간을 가르는 작두 그 위에 올라탄 존재라는 대사와 연결이 됩니다.
이 영화는 소수자 - 태생적이고 역사적이고 그러하기에 필연적으로 소수자인 - 에 대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4. '굿'의 핵심은 결국 '잊혀진 자들'을 다시 기억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상이나 과거의 한을 품은 원혼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몸에 빙의시키는 것 모두 사실은 '기억'의 맥락인 겁니다. 죽은 사람들은 곧 잊혀지는(잊혀진) 사람들이니깐요. 그러한 잊혀진 자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그것 자체가 한을 풀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사람들 역시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죠. 동일시의 카타르시스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나처럼 괴로웠던 저들의 한이 풀리는 것을 보니 내 한도 풀어지는구나의 카타르시스이며, 미래 시점에서 내가 한을 품고 죽으면 내가 죽더라도 한을 풀어주겠구나 라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그러나 또 그 내용은 과거의 사건에 묻혀있는 카타르시스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내는 한풀이인 것입니다.
5.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애기무당 넘세(김금화 만신의 유년시절 이름)는 무당이 된 다음 쓸 무구를 만들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죽은 쇠를 모아옵니다.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쇠들의 한을 그 쇠와 같이 녹여내고, 새롭게 무구를 만드는 것는 그 일련의 과정은 '굿'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무구가 이젠 죽은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고, 죽은 원령들을 불러내고, 다시 이 곳으로 살려내고, 그들의 한을 풀어내거나 그들의 한과 지금 우리의 한을 동일시하여 기억해주고 한 곳에서 녹여내는 '굿'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 역시 매력적인 일치입니다.
이 영화 역시 그런 굿과 마찬가지이겠습니다. 근현대사에서 죽어 잊혀졌던 사건들과, 그런 사건들을 김금화 만신의 삶과 굿으로 엮어내고, 한 필름 속에서 씬을, 몽타주를, 꼴라주를 만들어내어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또 이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 - 아역부터 대역과 스탭들, 감독, 그리고 김금화 만신 당신까지 - 이 모여서 쇠를 보태고 무구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었던 '한데 섞여 어우러짐' 일 것입니다.
6. 잊혀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잊혀진 자들을 기억해주는 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 김금화 만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면서요. 다만 그 '잊지 않음'을 추구하는 이 굿이라는 종합 예술 - 뮤지컬 같은 - 이 현대 사회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7. 임권택 감독이 이 영화를 '내가 꼭 만들고 싶었던 영화를 후배 감독이 만들어줘서 고맙다' 라고 팜플렛에 적혀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서는 임권택 감독이 이 영화를 다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저예산 독립영화이기에 가능했었던 그런 과감하고 실험적인 시도들의 상당수는 포기해야 하겠지만, 조금은 더 대중성있고 매끄러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8. 감상쓰기 짱어려운 영화인듯. 감상 쓰다가 내가 질려버려서 그냥 퇴고도 안하고 올림. 자 이제 다른 영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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